책읽기

파이 이야기_얀 마텔

마술빗자루 2008. 12. 30. 23:40

 

 

얀 마텔 저/공경희 역 | 작가정신 | 원제 Life of Pi | 2004년 11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다.

최근 들어 간만에 재밌게 본 책이다..

나름대로 두꺼운 책인데, 정말 쉽게 쉽게 책장을 넘기며 보았다..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파이라는 인도소년의 이야기다. 파이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 피신이라는 이름이 피싱(오줌싸개)으로 잘못 불리는데 스트레스를 받아온 주인공이 고안해낸 또 다른 이름이 파이다.. 피신 몰리토 파텔이 왜 파이가 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나, 솔직히 나는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파이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는다. 힌두사원과 이슬람회당과 천주교 성당의 예배에 모두 참여한다. 작가와 번역자,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작가에게 처음 전한 이는 파이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존재를 믿고, 확인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난 그렇지는 않다.. 신보다는 인간의 위대함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조금은 지루했던 전반부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파이의 모험으로 이야기가 연결된다. 가족 모두가 폰디체리의 동물원을 청산하고 캐나다로 이민가던 중,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침몰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파이 단 한사람. 그리고 그가 탄 구명보트에 파이의 동물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뱅골산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함께 있다. 그밖에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등이 함께 있다. 이들이 죽고 죽이고 하는 관계를 열 여섯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무려 227일간 표류하다 육지로 돌아온 파이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다면 누가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어느 한순간 온 가족을 잃고 맹수와 200여일을 견뎌낸 파이의 이야기가, 거창하게 우리 앞의 고난을 이겨갈 힘을 주는 이야기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엽기에 있어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수쟁이가 읽는다면 좋아할 문장들이 더러 있다.. ^^

 

 

[본문중에서]

 

다른 서커스 동물들도 마찬가지고, 동물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동물이 주인과 사귀기 위해 가장 끈질기게 노력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가장 충직하고 가장 필요한 동반자임을 증명해 보인다. 주인에게 도전하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큰고양이, 아메리카들소, 사슴, 야생 양, 원숭이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에게서 관찰된다. 동물업계에는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

 

서두르는 것은 전형적인 기독교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급히 서두르는 종교다. 이레 만에 창조된 세상을 보라.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창조는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한 영혼을 위한 싸움도 수세기 넘게 여러 대에 걸쳐서 계속될 수 있는 종교 속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기독교의 빠른 해결은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힌두교가 갠지스 강처럼 표표히 흐른다면, 기독교는 토론토의 출퇴근 시간처럼 부산스럽다. 기독교는 제비처럼 날렵하고, 구급자처럼 급한 종교다. 모습을 당장 드러낸다. 한순간 탕아가 되거나 구원 받을 수 있다. 기독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쭉 뻗쳐 있기는 하지만, 그 정수는 한순간에 존재한다. 지금 당장.

 

...

 

화물선 침춤 호에서는 돌고래 떼만 보였다. 화물선에서는, 태평양이 지나가는 물고기 떼 외에 다른 생명이 살지 않는 물의 황무지라고 생각했다. 화물선이 물고기 떼를 보지 못할 만큼 빨리 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후 알았다. 큰 배에서 바다를 보는 것은, 차를 타고도로를 달리면서 숲에 사는 야생동물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아주 빨리 헤엄치는 돌고래는 배 주변에서 놀기도 한다. 개가 차를 쫓아오는 것처럼. 돌고래 떼는 더이상 따라오지 못할 때까지 계속 옆에서 내달린다. 야생동물을 보고 싶으면 걸어야 한다. 조용히 걸어서 숲을 탐사해야 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 사는 풍요로운 바다생물을 구경하려면, 걷는 속도로 천처히 노닐어야 한다.

 

...

 

그런 순간이면 기운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남은 셔츠 쪼가리로 만든 터번을 만지면서 "이건 신의 모자다!"라고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바지를 만지면서 큰소리로 "이건 신의 의복이다!"라고 소리치곤 했다.

리처드 파커를 손짓하면서 크게 "이건 신의 고양이다!"라고 고함지르곤 했다.

구명보트를 가리키면서 목청껏 "이건 신의 방주다!"라고 소리 지르곤 했다.

양손을 쫙 펴면서 우렁차게 "이건 신의 넓은 땅이다!"라고 외치곤 했다.

하늘을 손짓하면서 크게 "이건 신의 귀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창조를 상기하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자리를 되새겼다.

하지만 신의 모자는 언제나 올이 줄줄 풀렸다. 신의 바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신의 고양이는 계속 위험스런 존재였다. 신의 방주는 감옥이었고, 신의 넓은 땅은 천천히 날 죽이고 있었다. 신의 귀는 잘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다도 되는 것에 대해새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

 

엄마 생일이라고 짐작되던 날, 나는 큰소리로 엄마에게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불러드렸다.

 

...

 

여러 가지 하늘이 있었다. 바닥은 평평하지만 윗부분은 둥글고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흰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잿빛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숨 막히게 자욱하지만 비는 올 것 같지 않은 하늘도 있었다. 얇게 내려앉은 하늘. 작고 흰 양털 같은 구름이 피어오른 하늘. 솜 덩어리를 늘어놓는 것 같은 얇은 구름이 높게 끼기도 했다. 형태 없이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하늘도 있었다. 짙고 거센 비를 머금은 구름이 지나만 갈 뿐 비는 뿌리지 않는 하늘. 모래톱처럼 생긴 작고 평평한 구름으로 자욱한 하늘. 수평선에 걸쳐진 덩어리로만 보이는 하늘. 태양빛이 바다에 밀려들면,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확연히 드러났다. 하늘은 내리는 빗줄기로 된 머나먼 장막이었다. 하늘은 층층이 있는 구름이었다. 어떤 것은 짙고, 뿌옇고, 또 연기 같았다. 하늘은 검은색이었고, 내 웃는 얼굴에 빗줄기를 뿌렸다. 하늘은 떨어지는 물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면 살은 쭈글쭈글해지고 퉁퉁 불었고, 몸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다. 바다가 주름살 하나 없다. 바람의 속삭임 조차 없다. 시간이 영원까지 계속될 듯하다. 어찌나 권태로운지. 의식불명에 가까운 상태로 빠진다. 그러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감정은 광품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두 상반되는 것조차 명확하게 남지 않는다. 권태 속에는 공포라는 요소가 있다. 눈물을 터뜨린다. 끔찍함이 당신을 가득 채운다. 비명을 지른다. 일부러 자해를 한다. 한데 공포의 손아귀 - 최악의 폭풍우 - 속에서도 당신은 권태를 느낀다. 그 모든 것과 함께 깊은 나른함을 느낀다.

죽음만이 지속적으로 감정을 흥분시킨다. 삶이 안전해서 침체했을 때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하거나, 삶이 위협받고 소중할 때 달아나게 한다.